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 Abstract
- 본 논문은 독도 영유권문제에 대해 지리학적 개념을 통해 접근함으로써 사료나 자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독도의 지리적 인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일본측의 주장에 대해서 라첼(Ratzel)의 생활공간(Lebensraum), 비달(Vidal)의 생활양식(genre de vie), 그리고 지명(geographical name or toponym) 등을 통해서 고찰하였다.
라첼의 생활공간 개념은, 유기체로서의 국가는 외부세력의 간섭이 없으면 영역을 확장하려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우산국은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 고려시대 중엽까지 활동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종 때에도 유산국도(流山國島)라는 지명으로 불릴 정도로 독자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적인 정치단위인 우산국의 존재는 독도를 인지, 이용, 영유하는 근거가 된다.
세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의 결과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지명(地名, geographical name, toponym)은 지역과 결합되어 오랫동안 유지되며, 역사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지명은 과거의 지리적 인식의 결과를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울릉도와 독도의 지명의 경우에 우리나라의 지명이 일본에 영향을 주어서 일본의 지명에서는 한국지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의 죽도 지명은 우리나라에서 울릉도를 부르는 지명으로부터 파생된 이름들이다. 다케시마라는 이름은 원래 무릉도(武陵島)에서 나온 무도(武島, 다케시마)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산(亏山)이라는 표기로부터 궁산(弓山)이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여기에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덧붙여지면서 무도(武島)는 ‘물가에 대나무가 자라는 섬’이라는 의미의 ‘기죽도(磯竹島, 이소다케)가 된다. 林子平의 「三國接壤地圖」(1785)에 울릉도를 궁숭(弓嵩, 이소다케)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울릉도가 종상화산으로서 해안으로부터 높이 솟아 있는 높은 산[嵩, 岳. 다케]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이소다케라는 명칭은 대나무의 생산과 관련해서 죽도(竹島, 다케시마)로 정착되는 과정을 겪었다. 따라서 울릉도의 일본식 지명이 다케시마는 무릉도(武陵島)와 우산(亏山)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의 다케시마는 그들이 연원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지명에서 영향을 받은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울릉도와 독도의 자원이용과 관련해서 살펴봤을 때, 전라도 남해안(특히 전라도 고흥) 어민들이 울릉도 이용에 관한 자료들은 우연히 울릉도에서 자원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매년 주기적인 형태로 울릉도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울릉도행은 지방관들의 체문(帖文)이나 채복공문(採鰒公文)을 통해 허용되었다. 울릉도는 쇄환정책이나 수토정책에 의해 관리만을 받는 땅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 활발하게 이용하던 땅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발한 이용은 항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해지역인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항해자들의 뛰어난 해역인식은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섬주민들의 수백㎞에 이르는 항해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동해안 울릉도와 독도 주변의 동한난류 및 동해해류의 특성은 여름, 특히 8월에 울릉도와 포항지역을 순환하는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해안의 어민들의 항해는 해류 등의 영향으로 매우 효율적인 항해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해안 어민들의 울릉도 이용과 관련해서 독도의 지명을 검토해보면, 독도는 근대 울릉도 개척이전부터 전라도 고흥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어민들에 의해서 독섬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자신들의 독도영유권 주장 10가지를 홍보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독도를 지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 지리학적 측면에서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한국은 독도를 인지하지 못한 반면에, 17세기에 일본은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과 관련된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독도의 인지문제는 우산국의 존재나 남해안 어민들의 울릉도 이용실태를 통해 봤을 때 잘못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영역개념이나 라첼의 국가유기체론에서 국가의 공간확장법칙 등을 고려하면 국가로서 우산국의 존재 및 조선초까지 우산국이 독립적인 정치단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영역으로서 이용되고 관리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쇄환정책과 함께 수토정책을 실시를 통해 울릉도를 관리하였다. 특히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명확히 밝히면서 진행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논쟁이 일단락되면서 일본인들의 도해가 금지되었고, 우리나라 어민들은 울릉도에서 매년 어채와 조선에 종사하였다. 특히 전라도 어민들은 1600년대 중반부터 1900년 조사 당시까지 울릉도를 왕래하였다. 19세기 자료에는 전라도어민들이 매년 울릉도에서 여러 척의 배를 만들고 있었다. 울릉도 주변의 탁월한 동해해류의 유형은 동남해안에서 울릉도로 직항하고, 돌아올 때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지나 포항 앞바다에 이르는 데 유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라도 어민들은 이러한 해류를 이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도에 대한 이용으로 이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부르던 방식대로 암석으로 이루어진 독도를 ‘독섬’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지명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 1904년 일본군함 천성호가 기록한 독도(獨島),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독도(獨島)로 자리를 잡게 된다. 게다가 독섬이나 독도는 일본식으로 부르면 모두 도쿠시마(トクシマ)이기 때문에 일본이 Liancourt Rock을 다케시마(竹島、タケシマ)로 명명하는데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은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17세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주장 또한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관계와 역사적 관계를 무시한 19세기 식민지적 발상에 불과하다.
둘째, 죽도(竹島, 울릉도)도항금지가 송도(松島, 독도)도항금지는 아니라는 주장은 안용복의 주장으로부터 시작된 조선과 일본사이의 영토쟁의의 결과를 왜곡하는 것이다. 막부가 죽도도항금지라는 이름의 조치를 취한 것은 죽도도해를 금지함으로써 송도도해 또한 금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리학적으로 경계가 형성되고, 그 경계가 하나의 장애(barrier)가 될 경우에 경계를 통과하는데 비용이 증가하고 효율성이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울릉도 도항이 금지된 상황에서 독도도항의 이익은 급격히 감소됨으로써 도항의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울릉도 도항금지와 관련해서 안용복이 제기한 ‘송도(독도)도 우리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일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기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리학적인 해석을 통해서 독도영유권과 관련된 더 많은 사실과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Takesima(竹島, pronounced as Dakesima)' means a Bamboo Island. However, there is no bamboo. This island is called 'Dokdo' in Korea. Dokdo means rock island. And Dokdo or another Korean Dokseom is pronounced as Dokusima in Japanese. In 1905, Japan incorporated Liancourt Rocks into Shimane Ken without any notification to Korea. And Japan named them as Takesima.
Japanese government has tried to make this island a 'disputed area' from 1952. During the process of San Francisco Peace Treaty between 'Allied Forces' and Japan, Japan didn't want to make restitution of Dokdo to Korea. In 1952, Korean Government declared the Peace Line on the seas based on SCAPIN no. 677. Japanese Government refused the Peace Line claiming their sovereignty over Dokdo.
Dokdo has continued to be an integral part of Korean territory since 512 A.D. At that time, there was "Usan-State(于山國)" including Ulleung Island, Dokdo and small islands. Until about 1400 A.D. "Usan-State" had maintained the political autonomy.
One of the Japanese claims is that the Koreans did not know the existence of Dokdo before 1905. From a geopolitical point of view, it's not logical. The geographical reasoning about the territory of "Usan-State" is as follows. First, following Ratzel's Lebensraum and the law on spatial expansion of nation, Dokdo was a terriotry of "Usan-State". Second, the geographical curiosity made people to explore, use, and territorialize it. Third, Ulleung Island and Dokdo have been historically conceived as a inseparable area by both the Koreans and the Japaneses.
In Chosun Dynasty, the management policies for these islands were the prohibition of residence in the islands and the recall of illegal residents by dispatching officials. But people permitted by local government could sail to these islands and built their boats, catched fishes, and collected medical herbs(i.e. Korean ginseng, 山蔘) every year. In 1900, it was reported that about 10 ships were built in Ulleung Island by Korean people every year. Especially, the active Korean users of these islands were from the south coast of Korea which is much remoter than the nearest Japanese area.
The Korean users from the south coast had experienced the shortage of resources which were pine trees for ship building, high quality abalones for tributes, precious herbs for many purposes, and so on. Ulleung Island was an alternative place for extracting necessary resources for them. Their final destination was Ulleung Island. But the traditional navigation needed extensive information on routes including sea currents, winds, and the geographical knowledge of the destination. Compared to the Micronesians, Dokdo was an important reference to Ulleung island for both the Koreans and the Japaneses.
For long time, the Koreans living around the south coast had called Dokdo as Dok-seom which is a dialectic of Dol-seom(rock island). It must have influenced on Seok-do(石島, rock island) in chinese character and the new name of Takesima.
The names of Ulleung Island were U-leung-do(亏陵島), Muleung-do(武陵島, 茂陵島) and Ulleung-do(蔚陵島, 鬱陵島). The name of Muleung-do was brought to Japan as Mu-do(武島). Japanese pronounced it Takesima(武島). Japanese called Takesima as Iso-takesima(磯竹島) alternatively. It is assumed that Iso-take(弓嵩), another Japanese name of Ulleung Island, was originated from Usan-State(亏山國). 'U'(于 or 亏) might had been read as 'Iso'(弓) and 'San'(山, mountain) as 'Take'(嵩, high mountain).
Both Dokdo and Dol-seom are pronounced as Dokusima in Japanese. About 1905 A.D. Japanese visitors in Ulleung Island must have been heard or used the name of Dokdo. This might influenced on the new name of Liancourt Rocks.
In conclusion, the geographical study of Ulleung Island and Dokdo is necessary to settle the disputes.
- Author(s)
- 백인기
- Issued Date
- 2009
- Awarded Date
- 2009-02
- Type
- Dissertation
- URI
- https://repository.sungshin.ac.kr/handle/2025.oak/5180
http://210.125.93.15/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5738
- Alternative Author(s)
- Paik, In Ky
- Affiliation
-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 Department
- 일반대학원 지리학과
- Advisor
- 권용우
- Table Of Contents
- 논문개요
Ⅰ. 서론 = 1
1. 연구배경 = 1
2. 연구목적 = 17
3. 연구방법 = 17
4. 연구자료 = 19
Ⅱ.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학술적 논의 = 28
1. 도서연구에 대한 지리학적 논의 = 28
1) 섬의 지리학 = 28
2) 영역성(Territoriality)과 생활공간(Lebensraum) = 34
3) 생활양식(genres de vie) = 37
2.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학 분야 논의 = 39
3.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비지리학 분야의 논의 = 44
4. 소결: 지리학적 연구의 필요성 = 46
Ⅲ. 생활공간(Lebensraum)으로서 울릉도와 독도 = 49
1. 독립적인 정치단위와 영역 = 49
1) 우산국과 이사부 = 49
2) 고려와 울릉도 = 52
3) 조선초 울릉도 쇄환정책과 삼봉도 탐사 = 56
2. 울릉도와 독도 주변 해류 = 57
1) 동해의 지리 = 57
2) 동해의 해류 = 62
3. 동일한 전통항해 영역으로서 울릉도와 독도 = 67
1) 전통항해 = 67
2) 울릉도 해역 항해와 독도 = 75
3) 사료 및 수토기록에 나타난 조선시대 울릉도 항해 = 80
4) 남해안(전남 고흥) 어부들의 울릉도 항해 = 83
4. 소결: 육지와 동일한 생활공간으로서 울릉도와 독도 = 89
Ⅳ. 지리적 인식으로서의 지명인지 = 90
1. 울릉도와 독도의 지명 문제와 지리적 인식 = 90
1) 울릉도와 독도 지명 문제 개요 = 90
2) 안용복 사건에서 울릉도와 독도 인식의 중요성 = 93
3) 세종실록지리지의 울릉도와 독도 관계 기술의 중요성 = 95
4)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의 중요성 = 96
2.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 98
1) 안용복사건 이전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 98
2) 안용복 사건이후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 99
3)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 101
4) 1905년 일본의 독도 시마네현 편입 = 102
3. 지명표기로 본 한일간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 104
1) 한자를 이용한 지명표기 = 104
2) 울릉도와 독도 지명의 다양성 및 일관성과 일본의 지명혼란 = 106
3) 일본에 있어서 울릉도와 독도 지명표기 = 115
3. 울릉도와 독도 지명이 일본의 지명표기에 미친 영향 = 116
4. 소결: 지명으로 본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의 일관성 = 118
Ⅴ. 울릉도와 독도의 자원과 이용 = 121
1. 조선후기 울릉도와 독도 이용실태 관련 주요 자료 = 121
1)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1882년) = 121
2) 안용복 활약시의 울릉도와 독도에서의 자원채취 갈등 = 128
3) 라페루즈 탐험대의 항해일지 상의 울릉도 = 131
4) 수토기록 및 다산 정약용의 기록 = 132
2. 울릉도와 독도 이용 = 133
1)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의 자원 = 134
2) 자원별 이용실태 = 137
3. 자원의 이용과 “채복공문”의 의의 = 140
1) 수토정책과 울릉도 이용 = 134
2) 채복공문의 의의 = 137
4. 소결: 생활양식으로서 울릉도와 독도 이용 = 143
Ⅵ. 결론 = 146
참고문헌 = 150
Abstract = 162
부록 = 165
- Degree
- Doctor
- Publisher
-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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