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K

藕泉 趙琬九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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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native Title
(A) study on Woocheon, Cho, Wan Goo
Abstract
3·1운동을 통하여 표출된 독립의지는 대한민국 임시정?罐? 낳게 하였으며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 내부의 인물분석에 있어서는 자료의 부족을 이유로 아직도 많은 연구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실체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며 이점에 착안하여 藕泉 趙琬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본고에서는 우천 조완구의 삶을 시기별 활동을 중심으로 5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제 1기(1881~1915)는 국내에서의 활동시기이다. 1881년 음력 3월 20일 서울 계동에서 출생한 조완구는 전통 한학을 공부한 후 한성법학 전수학교(현 서울법대 전신)에 입학하여 신식 법률학을 수학하였다. 당시 조완구가 공부했던 법률학은 그 후 법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임시정부 내에서 조완구로 하여금 법 기초의 주역이 되어 임시의정원을 이끌어가게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국내에서 內務府 參奉, 六品 承訓郎과 內部主事 및 增補文獻備考 교정 등을 역임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목도하고 이에 반발하여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항일민족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관직을 사퇴한 뒤 조완구는 주로 국내에서 종교를 통한 구국활동에 임하게 되는데 ?淪?적인 것이 일제의 종교침략에 반발, 儒敎改革運動으로서의 大同敎 運動과 단군을 기점으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大倧敎 運動을 들 수 있다.
제 2기(1915~1919)는 藕泉 趙琬九가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 龍井으로 향한 뒤 만주, 노령에서의 활동시기이다. 1914년 大倧敎 總本司가 만주로 이동한 뒤 우천은 대종교와 그 뜻을 같이 했던 것으로 이후 만주 노령에서의 대종교를 통한 활동은 순수한 종교적 측면보다 항일독립운동에 비중을 두었으며 동포 2세의 교육 및 각종 독립운동단체의 결성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또한 노령에서 1917년 全露韓族會中央總會의 기관지인『청구신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 기사를 기재하여 항일애국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1919년 2월 노령의 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國民議會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조완구는 노령의 국민의회 기호파 의원으로 추대되었다.
만주 노령에서 활동하던 조완구는 1919년 1월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여운형과의 만남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3월 말 상해로 와서 대한 민국 임시정부수립을 구체화 시켰다.
제 3기(1919~1945)는 大韓民國臨時政府, 韓國獨立黨과 함께 항일구국투쟁에 임했던 시기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조완구는 국민적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정부로서 갖는 많은 문제점과 초창기 정부수립의 어려움 속에서도 줄곧 임시의정원을 지키며 임시정부 법 기초의 주역으로서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1920년대 초 강력한 통일정부의 재조직을 요구하며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에 대해 조완구는 임시정부 절대유지를 주장하였으며 임정옹호 단체로 1922년 3월 중순 協誠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2년 10월 김구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인의 양성과 전비의 조성을 목적으로 韓國勞兵會를 결성하여 임정 쪽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는 의열투쟁으로 방략을 전환하여 1926년 1월 1일 丙寅義勇隊가 조직되었다. 조완구는 김구, 조소앙, 엄항섭, 박찬익 등과 병인의용대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 좌우세력이 연합하여 전민족적 대당체를 결성하고자 한 民族唯一黨運動을 추진하였다. 1927년 3월 以黨治國의 형태를 도입한 제 3차 개혁안이 발표되자 유일당운동이 더욱 촉진되었다.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韓國唯一獨立黨 上海 促成會가 4월 11일 개최되었다. 조완구는 본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민족의 독립적 역량?? 집중함에 노력할 것」등의 강령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냄으로서 첨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더니 마침내 1929년 상해 촉성회 해체를 시작으로 유일당운동은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좌익 측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상해 촉성회 해체모임에 조완구는 우익 측을 대표하여 李東寧과 참석했고 상해 촉성회 해체는 곧 바로 좌파중심의 留扈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에 우익 측에서는 임시정부를 유지해 나갈 조직의 결성이 필요했고 마침내 1930년 1월 25일 조완구, 김구 등이 중심이 되어 韓國獨立黨을 결성하였다. 유일당운동의 실패이후 계속되는 침체 속에 조완구, 이동녕, 김구 등 임정요인 5인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계획, 실행함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측에서는 한국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한국인들을 군관학교에 입학, 훈련시키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의거 이후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은 임시정부가 14년간의 상해시기를 청산하고 上海(1919)를 떠나 杭州(1932), 鎭江(1935), 長沙(1937), 廣東(1938), 柳州(1938), 기강(1939), 重慶(1940)?막? 이동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각 단체의 효율적 투쟁을 위해 민족 운동전선의 통일방안이 다시금 모색되었고 이로서 1932년 11월 韓國對日戰線統 一同盟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격상 연락기관에 머물고 구체적 활동을 할 수 없어 1934년부터 완전한 대동단결체를 만드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조완구는 한국독립당을 통해 대당조직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이론과 방법을 제시하는 등 대당조직 문제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대당조직에 있어 각 단체(黨)를 모두 해산하고 新黨을 만들 것과 아울러 임시정부 폐지론이 대두되자 조완구는 절대 반대하며 임정의 유지 옹호론을 폈다. 임정 중심체제를 고수했던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질 않았고 1935년 7월 民族革命黨이 창당되었다. 단일당으로서의 민족혁명당 창당됨과 동시에 한독당은 해체되었다.
한국독립당 해체 후 조완구는 임정을 지지 옹호했던 세력들과 더불어 1935년 11월 韓國國民黨을 결성하였다. 조완구는 한국국민당 결성 시 이사겸 비서로서 이사장인 김구와 더불어 한국국민당이 임정의 여당으로서 자리 매김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7년 4월 민족진영의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연합을 모색하던 중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이에 좌익 측은 1937년 12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주도하에 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양 진영은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요구와 중국국민당정부의 권유로 김구, 김원봉 합의 하에 1939년 5월 全國聯合陳線協會를 결성하였다. 1939년 8월 27일 좌우익 단체대표들이 만나 7당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조완구는 한국국민당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결렬되었다. 단일당 운동에 실패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소속 3당(韓國國民黨, 再建韓獨黨, 朝鮮革命黨)은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40년 5월 8일 3개 당을 해체하고 다음날 韓國獨立黨으로 통합되었다.
1939년 기강으로 옮긴 임정은 전시체제로 정비하였고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상해시기처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중경 임정의 강화와 더불어 한독당의 내부에는 주도세력의 변화가 생겼다. 民族革命黨이 임정에 참여한 가운데 1943년 4월 민족혁명당 간부 왕통과 임정 비서 黃民이 결탁하여 金九, 趙琬九, 朴贊翊, 李始榮, 曺成煥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왕통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조완구의 사전발각에 의?? 막을 수 있었는데 임정 5요인 암살사건은 이후 한독당 내의 김구계와 민족혁명당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중경시기 주목할만한 성과로는 光復軍의 成立을 들 수 있다. 1940년 5월 9일 조완구, 김구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 통합체로서 통합한독당을 결성한 이후 한독당은 광복군 편성을 한독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로 결정하였다.
중국 측으로부터 광복군 창설에 관한 비준을 어렵게 얻었으나 중국 측은「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제시하여 중국국민당정부의 관할 하에 규제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대해 조완구는 중국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죽을 각오로 임해서라도 이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제시했고 마침내 임정은 1944년 8월「광복군 9개 행동준승」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이로서 광복군은 임정의 직할 군대가 되어 임정의 직접 지도하에 국토수복 작전에 임할 수 있었다. 또한 1941년 建國綱領을 발표하고 현법을 개정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건국강령은 한독당에서 조완구 등 7인의 기초위원이 되어 제시한 三均主義를 표방한 것으로 이해된다. 건국강령에 대해 조완구는 적극 옹호론을 됐으며 1942년 부터 임시의정원 約憲修改委員會 위원으로 선정되어 새 헌법에 건국강령을 반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임정수립으로부터 광복 후 귀국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으로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투신한 조완구는 광복을 맞아 연합국으로부터 정식정부로 승인을 받지 못한 채 개인자격으로 1948년 12월 2일 귀국하였다.
제 4기(1945~1950)는 광복 후 국내에서의 활동 시기를 들 수 있다. 1945년 12월 2일 입국한 조완구는 신탁통치 반대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견지하면서 적극적으로 反託運動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독당 활동을 통해 시종일관 좌우합작을 지지함으로서 통일국가 수립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환국 한 후 임정 측에서는 1946년 1월 4일 중경 임정을 계승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였다. 임정 측이 제시한 비상정치회의는 좌익 측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 4당 회의, 5당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결국 좌우합작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를 개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이숭만과 김구가 추대되었다. 이에 대해 좌익계는 좌익의 양해 없이 우익 각 당파만으로 소집됨을 지적, 비판하였다.
1946년 2월 1일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여 의회로서 기능 할 것을 자임한 비상국민회의가 소집되었다. 또한 과도정부수립을 위한 최고의결결정기구인 최고정무위원회가 설치되고 최고정무위원으로 조완구 둥 28명이 선임되었다. 즉 비상국민회의 소집은 신탁통치반대열기를 모아 정부수립으로 연결시켜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비상국민회의는 의정원의 직능을 계승하고 최고정무위원회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계승하여 정부수립의 모체로서 그 역할을 다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완구 등 임정요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군정은 1946년 2월 14일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사령관의 자문기관인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개편시켰다.
1946년 7월 10일 중도파가 중심이 된 左右合作委員會가 구성되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입법기관의 설치를 구체화시키자 조완구는 미군정의 필요에 의해 설치된 입법기관에 대해서 반대를 표하며 민족의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적 통일국가수립만이 유일한 그의 뜻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때문에 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불참을 주장하고 끝내 추천을 거부, 미군정 하에서의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이 중간당화 또는 우익화 하여 본질을 잊은 채 실질적인 좌우합작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마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함에 따라 조완구 등이 주장했던 좌우합작운동은 노선을 달리하여 1948년 南北協商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실패이후 분단정부가 수립되리라는 예측 하에 조완구 등 임정 요인들은 남북대표회의를 통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노선의 변화를 보이면서 남북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완구 등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만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길임에 인식을 같이하고 남북요인회담 추진위원회 설치를 결의하였다. 조완구는 남북요인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선정, 통일국가수립을 위한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이어 3월 11일 金九, 金奎植, 趙琬九, 趙素昻, 曺成煥, 金昌淑, 洪命熹 등 민족진영 7요인이 공동성명(7거두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완구를 포함한 7요인은 단독 선거를 극력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2월 16일 남측에서 김구,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요인회담에 대해 북측에서 받아들임으로서 조완구, 김구, 조시원이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어 남북회담에 파견될 대표를 선출하였다. 마침내 1948년 4월 18일부터 30일까??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개최되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질 시점에서도 조완구 등은 단정수립을 반대하며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을 계속 펼쳐나갔다.
1948년 6월부터 추진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확대 개편 논의는 7월 21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고,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국가 수립에 노력할 것을 천명한 통일독립촉진회에서 조완구는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통촉이 전개하고 있는 남북통일운동에 유엔이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 조완구 등이 추진한 南北協商運動은 유엔의 협조, 즉 미·소의 협조아래 남북협상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1949년 6월 25일 김구가 암살 방함으로서 이들의 統一國家樹立運動은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김구 사후 조완구는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체제 개편에 나섰으나 6. 25전쟁 중 조완구 마저 납북 당함으로서 통일국가수립운동은 끝을 맺게되었다.
제 5기(1950 ~1954)는 납북 후 대북 활동시기로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부족으로 인해 구체적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부족하나마 몇몇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납북과정과 납북 후의 조완구의 활동방침??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6. 25전쟁 중 북측의 '모시기공작'에 의해 강제 연행된 조완구의 나이 당시 70 세였다 조완구는 납북요인들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막아보고자 휴전운동을 제의하였다. 더 이상의 전쟁을 반대하며 외국의 군대철수와 간섭배격을 주장하였으며 휴전협정을 통해 남북국민에 의한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완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완구는 한국독립당 대표로 휴전운동에 임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소식이 알려지자 남북요인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환향 요구와 더불어 평화통일을 실현하여 남북 통일정부수립문제를 다루는 정치회의에 자신들이 한국의 민족 애국세력 대표로서 참석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 등 을 건의했다. 이어 趙素昻의 中立化 統一方案이 제기되었다. 조완구, 조소앙 등은 중립화 통일방안만이 전민족적인 유일한 통일방안임을 주장하였다. 1954년 7월 조완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제 설자리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는 韓國獨立黨를 再建으로 뜻을 모았다.
1954년 10월 臨時政府, 韓獨黨과 더불어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험난한 역정과 궤도를 같이했던 조완구는 韓國獨立黨 再建을 유언으로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우천 조완구는 1910년을 전후로 한 국권상실의 시기에 大同敎, 大倧敎 등의 종교활동을 통해 항일구국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3·1운동이후 전국민의 독립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상해에 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케 하였다. 이후 임정수립으로 부터 광복 후 귀국할 때까지 27년간을 중단 없이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며 실질적 주도세력으로 존재해 왔다. 또한 귀국 후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左右合作運動, 南北協商運動을 통해 조국의 統一國家樹立을 주창해 온 인물이었다. 일평생을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통일국가수립을 위해 현신하며 진정한 애국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 그의 삶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결코 과소 평가됨이 없이 부각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Woocheon, Cho, Wan Goo was born in the period of cricis internally and externally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e resigned official post as he gave vent to his anger about the conclusion of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while he led the life of government post as a bureaucrat of Korean Empire. And, he participated in anti-Japanese national movement.
First, as for the activities of Woocheon, Cho, Wan Goo inland, there are great same religion movement and great religion movement. He resisted the invasion policy of religion of Japanese Imperialism by executing great religion movement as the reform movement of Confucianism in 1909. And, in the same year, he acted as an executive of gerat religion by entering into membership in great religion. After 1905, he promoted the education of the 2nd generation of overseas Koreans and all sorts of anti Japanese national movement through great religion.
Next, the activity 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may be enumerated. After establish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t Sanghai on the 3rd of 1909, he stuck to the system centering around provisonal government all alike.
He acted as a leader of this group by organizing co-operation association which is the group to protect provisional government at March in 1922 and Byoungin volunteer corps at January in 1926 and invigorated the stagnated provisional government newly by discussing and planning the patriotic deed of Lee, Bong Chang and Yoon, Bong Gil in Korean Patriotism Corps in 1932. After that, due to the retaliatory attack of Japanese Imperialism, provisional government left Sanghai and came meet movement period.
Cho, Wan Goo insisted on the organization of Independence Army through the activit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after provisional government transferred to Choongkyoung in 1940, and he solidified the new reign base of Independence Korea through the platform of the establishment of a country.
In the reorganization of political guidance system of provisonal government over 5 times, Woocheon, Cho, Wan Goo passed through the important post of provisional government such as the vice-chief of home affairs, the general manager of labor bureau, the chief of home affairs, the chief of secretary, and the chief of financial department etc. all around. In addition, the parliamentism activity of Cho, Wan Goo without discontinuance received the mantle of provisonal government.
And, this researcher examined about the activit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After the failure of national unique party movement in 1927, the necessity of organization which will maintain provisonal government centering around right wing came to fore. So, on the 25th of January in 1930, Cho, Wan Goo and Kim, Goo etc. organized Korean Independence Party. Cho, Wan Goo prepared party policy and party compendium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by being elected as a basic committeeman.
At July in 1935, nation revolution party was organized as a single party. With this, Korean Independence party was disorganized.
After that, Cho, Wan Goo organized integrated Korean Independence Party by promoting the integration of Korean National Party, Korean Independence Party of Reconscruction, and Chosun Revolution Party positively in 1940.
Woocheon, Cho, Wan Goo who presented the necessity of anti-Japanese national unification frontline and clarified the will of resistance of natinal unification frontline through the activit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became the substantial leading power in Korean Independence Party, and his political activity through Korean Independence Party continued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also.
Lastly, this researcher examined about the activity of Woocheon, Cho, Wan Goo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Cho Wan Goo who entered a country on the 2nd of December by meeting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started the positive movement to oppose trusteeship and insisted on the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unification nation through the co-operation of left and right by race.
As the U.S. Soviet Joint Commission over 2 times failed, the co-operation movement of left and right that Cho, Wan Goo etc. insisted came to be linked to South-North Negotiation Movement in 1943. These mapped out the establishment of unification nation through South-North negotiation under the co-operation of UN. But, as Kim, Goo was assassinated and even Cho, Wan Goo who as the chairman of central execution committee was kidnapped during war, the move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unifcation nation failed to develop any more.
After kidnapping, Cho, Wan Goo presented the armistice movement and the scheme of neutralization unification and breathed his last breath due to disease at October in 1954 while he started the reconstruction movement of Koraen Independence Party.
Woocheon, Cho, Wan Goo was person who led the complete independence of motherland under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unification nation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on the basis of honest and uplight nature. It is considered that it is natural that his whole life is embossed as a real leader in Korean modern history.
Author(s)
崔惠景.
Issued Date
2002
Type
Dissertation
URI
https://repository.sungshin.ac.kr/handle/2025.oak/5154
http://210.125.93.15/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1513
Affiliation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Department
사학과
Description
국문요약: p. ⅰ-ⅸ
Table Of Contents
論文槪要 = ⅰ
目次 = ⅹ
Ⅰ. 序論 = 1
Ⅱ. 藕泉의 出生과 民旒意識의 形成 = 6
Ⅲ. 愛國啓蒙運動期 大同敎運動 = 14
1. 藕泉의 大同敎 活動과 變遷 = 15
2. 愛國啓蒙運動期 日帝의 宗敎政策 = 26
3. 日帝 宗敎政策에 대한 懦敎界의 反應 = 40
Ⅳ. 大倧敎를 통한 藕泉의 愛國活動 = 47
1. 大倧敎의 布敎活動 = 48
2. 大倧敎의 抗日 民族獨立運動 = 55
3. 大倧敎의 民族敎育活動 = 60
4. 光復 後의 大倧敎와 藕泉의 活動 = 68
Ⅴ. 大韓民國臨時政府와 藕泉 = 77
1. 上海 時期 = 77
1)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樹立 = 77
2)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期 議政院의 活動 = 80
3) 國民代表會譏 召集과 唯一黨運動 = 91
4) 上海時期 組織變遷과 藕泉의 活動 = 101
2. 移動時期 = 108
1) 韓人愛國團의 活動과 臨政의 移動 = 108
2) 移動晴期 政府組織과 藕泉의 任務 = 109
3. 重慶時期 = 116
1) 建國綱領의 制定 = 116
2) 韓國光復軍의 成立 = 118
3) 重慶時期 組織變遷과 藕泉의 獨立運動 = 121
Ⅵ. 韓國獨立黨과 藕泉 = 129
1. 韓國獨立黨의 組織變遷 = 129
1) 上海 韓國獨立黨. = 129
2) 再建 韓國獨立黨 = 141
3) 韓國國民黨 = 144
4) 統合韓國獨立黨 = 157
2. 韓國獨立黨의 理念과 活動 = 163
1) 上海 韓國獨立黨 = 163
2) 再建韓國獨立黨 = 167
3) 韓國國民黨 = 169
4) 統合 韓國獨立黨 = 172
3. 韓國獨立黨의 臨政擁護와 藕泉의 活動 = 174
Ⅶ. 光復 後 藕泉의 活動 = 183
1. 歸國과 政黨活動 = 183
1) 國內의 政治狀況 = 183
2) 歸國 後 韓國獨立黨 活動 = 194
2. 反託과 左右合作運動 = 206
3. 南北協商과 統一國家樹立運動 = 233
4. 拉北과 韓國獨立黨 再建運動 = 248
Ⅷ. 結論 = 255
參考文獻 = 263
ABSTRACT = 273
Degree
Doctor
Publisher
誠信女子大學校 大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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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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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엠바고200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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