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와 빈민통제
- Abstract
-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5·18 광주항쟁에서 빈민은 군사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항쟁의 확산을 우려한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항쟁을 강경하게 진압한 후, 전국적으로 ‘불량배’ 단속을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나 중산층 시민보다 빈민이 많이 연행되었는데, 잠재적으로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민의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불량배’로 몰아가며 단속하였다. 삼청교육대 사업은 이러한 단속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었다.
신군부는 ‘불량배’를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 사업을 실행하였지만, 전과가 전혀 없거나 이미 법 처분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 피해자 대부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불량배’란 개념 자체가 모호한 것이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사람들이 쉽게 강제 연행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언론은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진짜 ‘불량배’인 것처럼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였고, ‘불량배’는 처벌해도 된다는 사회적 편견과 맞물리면서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삼청교육대 사업으로 피해자들은 짧게는 4주, 길게는 5년 이상을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다. 피해자들은 장기간 연행되면서 신군부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그들이 한꺼번에 사회로 복귀하여 불만 세력화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반발과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순화교육뿐만 아니라 근로봉사와 보호감호 처분까지 실행하면서 그들을 사회적으로 격리시켰다.
삼청교육대 사업은 피해자들을 철저히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특히 ‘잠재적 저항세력’인 빈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신군부는 언론을 활용하여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조장하였다. 또한 사후관리라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전과를 통해 그들의 일상 전반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하였다. 빈민은 삼청교육대를 퇴소한 뒤에도 여전히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져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삼청교육대 사업을 활용하여 빈민을 통제하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을 길들이려 하였다. 우선 ‘불량배’와 거리가 멀고 빈민이라 할 수 없는 지식인층을 길들이기 위해 삼청교육대에서 이른바 ‘군기 잡기’를 실행하였다. 또한 신군부는 ‘불량배’로 표상된 피해자들을 응징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일반 시민은 신군부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불량배’로 향한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일반 시민은 삼청교육대 사업에 동참자가 되었던 것이다.
본 논문은 신군부의 삼청교육대 사업을 빈민통제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삼청교육대는 신군부의 폭력성과 인권 의식, 그리고 통치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따라서 빈민통제뿐만 아니라 삼청교육대 피해 사례와 문제점, 그리고 삼청교육대에 대한 인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야할 것이다.
- Author(s)
- 손광명
- Issued Date
- 2016
- Awarded Date
- 2016-08
- Type
- Dissertation
- URI
- https://repository.sungshin.ac.kr/handle/2025.oak/3996
http://dcollection.sungshin.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1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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